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지워터 : 불타는 파도 (문단 편집) === 3막 1장 [*2] === >피 >진실 >죽음의 여신 ||또다시 얼굴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쾅 소리를 내며 이내 갱플랭크 배의 갑판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머릿속에서 새 떼가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과 함께 통증이 뒤따랐다. 손목에 채워진 무쇠 수갑이 살을 파고들었고 부어오른 손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놈들은 나를 거칠게 끌어다 트위스티드 페이트 옆에 무릎 꿇게 했다. 이 악랄한 놈들이 일으켜 세웠더라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슬쩍 보니 해적 놈들은 한 건 한 듯 잔뜩 들떠 있었다.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해적 놈이 눈앞에서 얼쩡거렸다. “이 코흘리개 자식아.” 퉁퉁 부은 입안 때문에 발음이 뭉개졌다. 아릿한 피 맛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들었다. “주먹질 하나 제대로 못 하냐?” 순간 다시 한 방 먹고 말았다. 폐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몸을 관통해 갑판에 쓰러졌다. 그러자 놈이 내 팔을 끌어당겨 다시 무릎 꿇게 했다. 입안에 고인 피를 칵 뱉어내자 부러진 이가 딸려 나왔다. 씩 웃어 보였다. 우락부락한 해적 놈은 뚫어질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식하게 힘만 센 놈이었다. “돌아가신 지 오 년 된 우리 엄마도 너보단 주먹이 셌어.” 놈은 한 대 더 날릴 기세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갱플랭크의 손짓 한 번에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딱 놈의 꼭두각시다웠다. “그만.” 나는 휘청거리면서도 갱플랭크를 똑바로 쳐다보려 애썼다. 그러자 희미하던 시야가 점차로 밝아왔다. 갱플랭크의 허리춤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훔치려 했던 단검이 꽂혀 있었다. 아름다운 단검이다. 꼴에 보는 눈은 있나 보군. “트위스티드 페이드. 솜씨가 좋다는 얘긴 많이 들었다. 난 원래 손재주가 좋은 도둑을 존중해.” 갱플랭크가 트위스티드 페이트 쪽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하지만 진짜 솜씨 좋은 도둑이라면 내 물건에 손대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 텐데…” 그러더니 몸을 낮춰 내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불을 뿜을 듯 뜨거운 동시에 한기가 서린 눈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레이브즈…… 네놈이 털끝만큼이라도 분별이 있었다면 내 밑에서 일했겠지. 이미 물 건너간 얘기지만.” 그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갱플랭크는 가뿐히 일어나 우리를 등지고 섰다. 거대한 바위가 앞을 가로막듯 우뚝 솟은 어깨를 보니 현기증이 일었다. 깊고 굵은 목소리가 안개처럼 갑판에 드리웠다. “난 상식적인 사람이다. 전부 나한테 복종하길 원하는 게 아니야. 그저 적당히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자는 건데…… 네놈들에게는 눈 씻고 찾아봐도 존중이란 없더군. 그럼 대가를 치러야겠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의 얼굴에서 눈썹이 꿈틀거렸다. 맹수가 사냥감을 찾는 것처럼. 갱플랭크의 수하들이 굶주린 사냥개마냥 우리를 에워쌌다. 하지만 떨지 않았다. 놈들이 만족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나는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려 기를 쓰며 고개를 쳐들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나는 턱짓으로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가리켰다. “저 자식이 죽는 걸 두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줘.” 갱플랭크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좀처럼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원 하나가 냉큼 달려가 배에 달린 종을 쳐댔다. 뇌리를 울리는 강렬한 소리.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소리다. 항구 쪽에서도 화답하듯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왔다. 이내 피 냄새를 맡은 쥐가오리 떼처럼 취객, 뱃사람, 장사꾼들…… 온갖 시정잡배들이 구경거리를 찾아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거군. 갱플랭크는 누가 이 섬의 주인인지 모두에게 똑똑히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온 빌지워터가 다 지켜보고 있으니 잔치를 시작해 볼까!” 그가 호탕하게 외쳤다. “죽음의 여신을 대령해라!” 쿵쾅대는 발소리와 흥분 서린 환호가 갑판을 가득 메웠다. 소란을 뚫고 오래된 대포가 그르렁거리며 이끌려 나왔다. 낡고 녹슨 대포는 초록빛으로 변색되었지만 그럼에도 독특한 아름다움을 풍기고 있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흘끗 살펴보았다. 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다문 채였다. 붙잡히자마자 카드는 모조리 빼앗겼다. 해적 놈들은 심지어 그 바보 같은 중절모마저 가져가 버렸다. 완전히 망가져 버린 차림의 그가 낯설었다. 이런 순간을 모두에게 들켜버리다니 적잖이 속이 상할 거다. 구경꾼 무리 중 웬 양아치 같은 자식이 그 모자를 쓰고 있었다. 긴 세월 동안 트위스티드 페이트를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구석에 몰려 빼도 박도 못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탈출할 길이 전혀 없는 지금, 그의 얼굴에서 패배감이 검은 물처럼 넘실거렸다. 고소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감정이 종잡을 수 없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좋아.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다. 뱀 같은 놈.” 그러자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돌아보았다. 그는 울분을 억누르듯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일이 이렇게 돼버린 게 좋진 않았……” “나를 수용소에서 썩게 내버려뒀잖아!” 간사한 세 치 혀를 더 이상 놀릴 수 없게 말을 끊어버렸다. 놈은 곧바로 되받았다. “우린 널 빼내려고 별짓을 다 했어! 너 때문에 죽은 애들도 있다고. 알기나 해? 콜트, 월러치, 브릭…… 전부 죽었어! 바로 너같이 멍청한 놈 때문에!” “그래도 넌 살았잖아.” 나도 쏘아붙였다. “겁먹고 혼자만 도망친 거겠지.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없어.” 급소를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거무죽죽해졌다. 더 따지고 들 것도 없었다. 발끈하며 불꽃을 뿜던 눈빛이 잠잠해지고 어깨도 축 늘어졌다. 할 말이 없는 거겠지. 나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전부 죽었다고? 정말로? 놈이 아무리 연기를 잘한대도 이런 모습까지 꾸며낼 수는 없을 거다…… 용암처럼 흘러넘치던 분노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대신 성난 파도처럼 피로가 덮쳐왔다. 나는 오랜 시간 견뎌온 고통과 이번 소동으로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 십 년은 더 늙은 기분이었다. 분노만이 벗이 되어준 수용소 시절이 희미한 연기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입을 뗐다. “일이 그렇게 틀어진 건…… 아마 우리 둘 다에게 잘못이 있었던 거겠지.” 그리고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거짓말이 아니야. 우린 진짜 널 구하려고 갖은 애를 썼어. 어차피 넌 믿고 싶은 것만 제멋대로 믿겠지만……” 놈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십 년 동안의 분노를 거스를 시간. 하지만 곧 이미 내가 놈을 믿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망할. 이 자식의 말이 맞다. 나는 늘 멋대로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다 위험에 처할 때면 뒤를 지켜줬던 건 트위스티드 페이트였다. 늘 탈출할 패가 있었으니. 그날 나는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둘 다 죽음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그때 해적 놈들이 우리를 대포 앞으로 끌고 갔다. 갱플랭크는 무슨 혈통 있는 사냥개라도 다루듯 대포의 주둥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빛바랜 초록 대포가 바다와 잘 어울렸다. 죽음에 대한 암시처럼 나는 그 장면을 마음 깊이 새겼다. “죽음의 여신. 쓸모는 다했지만 그간 수많은 놈들을 날려버렸지. 꼭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해주고 싶었어.” 선원들이 묵직한 쇠사슬로 대포를 감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것 같았다. 놈들은 다리에 채워진 쇠고랑에 쇠사슬을 연결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서로 등을 맞대도록 했다. 쇠사슬을 고정하는 자물쇠가 달칵 소리를 내며 단단하게 잠겼다. 해적들은 빈정대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배 가장자리의 탑승구가 열리고 대포가 그 앞에 놓였다. 벌떼처럼 선착장과 부둣가를 메운 구경꾼들이 숨을 죽이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거세게 귓전을 울렸다. 유난히 높아 보이는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갱플랭크는 위풍당당하게 대포 위에 한 발을 올렸다. “오늘은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어깨너머로 중얼거렸다. “결국은 네놈 때문에 죽게 될 것 같더라고.”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삶을 넘어선 사람의 미소였다. 나 또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우리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배의 난간으로 끌려갔다. 우리의 뒤를 따라 뚝뚝 떨어진 피가 긴 띠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나도 여기까지다. 괜찮은 인생이었다. 누구나 운이 다하는 순간이 오는 법…… 미련은 없다. 그런데 순간 뇌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나는 수갑이 채워진 팔을 뒤틀어 조심스럽게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창고에서 떨어트린 카드가 만져졌다. 최후의 때가 오면 이 자식 목구멍에 쑤셔 넣으려고 주워뒀던 거였다. 해적 놈들은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몸을 수색해 카드를 빼앗았지만 방심하고 내 몸은 뒤지지 않았다. 트위스티드 페이트의 옆구리를 툭 쳤다. 등을 맞대고 있어 카드를 몰래 넘겨주는 건 쉬웠다. 그의 손이 주저하듯 맴돌다가 카드를 가져갔다. 그 순간 갱플랭크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렸다. “약소하긴 하지만 제물은 제물이니까. 여왕 바다뱀에게 내 안부나 전해라.” 놈은 왕이라도 된 양 관중들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더니 발을 들어 대포를 난간 밖으로 힘껏 밀어냈다. 폭죽이 터지듯 난간 위로 하얀 물보라가 솟구쳤다. 마법사의 모자에서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이 대포는 순식간에 시커먼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연결된 쇠사슬이 딸려가며 드르륵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마지막에 와서야 깨달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트위스티드 페이트는 언제나 나를 탈출시키려 온갖 수를 썼다. 그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탈출시켜 줄 수 있었다. 이것만은 해줄 수 있다. 다행이다. “빨리 가.” 그러자 날렵한 손동작이 늘 하던 것처럼 능숙하게 카드를 돌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힘이 모여들자 머리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이래서 이 자식이 카드 쪼가리로 장난칠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눈을 감았다. 힘은 점점 커지며 성난 바다 위로 몰아치는 태풍처럼 존재를 빨아들이듯 휘몰아쳤다. 그 순간, 트위스티드 페이트가 사라졌다. 빈 쇠사슬이 뱀 허물마냥 갑판으로 소란스럽게 떨어졌다. 구경꾼들은 감탄이 뒤섞인 괴성을 내질렀다. 내 발에는 여전히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나는 빠져나갈 수 없다. 그렇지만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갱플랭크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평정을 잃은 갱플랭크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다로 빨려 들어가던 쇠사슬이 발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충격으로 온몸의 뼈가 뒤틀려버린 듯 앓는 소리가 나왔다. 순식간에 난간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은 차디찬 바닷물이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단단한 손이 몸을 꽉 움켜쥔 것처럼.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나를 더 깊이 끌어당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